글번호
69087
작성일
2019.07.19
수정일
2019.07.22
작성자
장민주
조회수
49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지음, 황문수 옮김

오이디푸스 왕 / 소포클레스 지음, 황문수 옮김 첨부 이미지

너무나 운명적인 그러나 너무나 자율적인

 

  

 ,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맨 처음 읽었을 때는 엄청난 충격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흥을 거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후 마음을 가다듬느라 집어든 책이 하필이면 오이디푸스 왕이었으므로. 나름 절망에 빠져있던 내가 집어든 책이 하필이면, 비극 작품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오이디푸스 왕이라니.

   그때 나도 모르게 면역주사를 맞은 것일까. 이후, 슬픔과 절망의 더께가 쌓일 때마다 한 겹씩 풀어나가는 힘이 나도 모르게 더러 생기기도 하는 것이. 이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세상에, 삶에서 비극의 정조를 이토록 절절하게 말해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그래서 책으로 인연 맺는 사람마다 걸작인 오이디푸스 왕을 권하게 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극 경연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상연되던 작품을 비극이라 부른 것이다,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비극이 아닌. 이때 기존의 신화나 전설 등 널리 알려진 이야기를 작가들이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하는 것이 비극 경연대회의 관건이었다 한다. 여기서 비극작품을 버무리는 작가들은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터라, 이렇듯 알려진 이야기를 가지고 어떻게긴장감을 조성하느냐가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포클레스는 굉장히 탁월했고 명민했다. 그가 오이디푸스 왕을 내용과 형식과 의미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너무나도 탁월하게 재창조해냈기 때문이다. 그 뛰어난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먼저, 내용적인 부분에서 보면(물론 편의상 내용과 형식과 의미로 나누어 살피지만, 이 세 가지 요소는 일정 부분 뒤섞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왕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존재에 대한 질문을 안고 삶의 의미망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를 축으로 펼쳐진다. “테바이의 왕가에 자식을 내면 부모는 죽는다.”는 신탁을 받은 테바이의 왕인 라이오스 왕은 세상에 나온 지 사흘밖에 안 되는 자식을 내다버리라 명한다. 원령이 되어 다시 찾아올까봐 쇠꼬챙이를 발에 꿰어서 버리는데(여기서 부은 발이라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생긴다), 그 아이는 이웃나라인 코린토스의 자식 없는 왕 폴리보스에게 넘겨져서 왕자로 잘 자란다. 주워온 아이라는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긴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탁에 가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을 접하고 코린토스를 떠난다. 길을 찾아 나서던 중 세거리에서 노인을 만나 언쟁을 벌이다 그만 그를 죽이고 마는데, 그 노인은 다름 아닌 그의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 오이디푸스는 테바이를 저주로 물들인 스핑크스가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고,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아 두 아들과 두 딸을 낳는다. 이후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신탁의 비밀을 결국은 굳이’ ‘스스로알아내고 두 눈을 금 브로치로 찌른 후, 남은 두 딸을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의 오빠인 크레온에게 부탁하고 나라 밖으로 길을 나서는 것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다음으로, 형식적인 부분을 보자.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하루 동안 모든 일들이 죄다 일어난다. 물론 앞서 살펴본 내용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리스극은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을 토대로 쓰인 것이어서, 사건의 중간에서 바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의 궁전 앞 제단 주위에 모여 탄원하는 백성들 앞에 등장한 오이디푸스의 대사로 시작된다(“내 아들들이여, 오래된 카드모스의 새로 태어난 자손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이 두려워, 아니면 무엇을 바라고 여기 앉아 있는 것이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발생한 오이디푸스의 잘못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그가 잘못인 줄 모르고 행한 과오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사건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지 않고 피드백 형식으로 펼쳐진다.

   도입부와 결말을 제외하면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오이디푸스 왕은 이른바 수사극 형태를 띤다. ‘누가 라이오스 왕을 죽였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형식을 취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이 작품이 채 절반에 이르기도 전에 미리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에 오이디푸스의 명민한 대사가 범인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처음에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차근차근 진실에 다다른다. 이때 진실에 다다르는 실마리를 단계적으로 엮어가는 대사들이 너무나 정교하고도 치밀해서 감탄을 멈추기가 힘들다. 특히, 범인이 오이디푸스라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무대인,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가 벌이는 대화의 장면에 이르면, 신적인 권위와 이성적인 권위가 맞부딪치면서 번쩍이는 감동의 향연 한가운데 있는 듯 가슴이 먹먹하기까지 하다. 특히 이 부분은 소리 내어 몇 차례 거듭 읽기를 권한다. 그리스극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제일 중요한 장면은 한가운데 나온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상의 놀랍도록 경이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특히 놀라운 사실은 필연성에 의해서 사건들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너무나도 세밀하게 잘 연결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이디푸스 왕을 운명극이라 말한다. 물론 운명극이라 여겨질 만한 요소들을 오이디푸스 왕이 듬뿍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탁의 예언이 사실로 드러나는 대목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을 운명극이라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극에서 신의 뜻으로 표명되는 운명이 항상 인간의 힘을 능가하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인 것은 맞지만, 운명은 항상 인간을 통해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 속 인간들은 대부분 신들이 예언한 결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욕망이나 계획이 있고 나아가 운명이라는 것도 인간이 그들의 의지로 몰고 가는 것으로 극 중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이디푸스에게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오이디푸스는 굳이 진실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태생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나 파국이 닥친다 할지라도 진실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으로 믿는 사림이다. 이러한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뛰어넘는 인물의 우뚝함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면서 오이디푸스 왕을 아주 뛰어난 작품으로 이끄는 것이다.

   또 다른 형식적인 특징은 아이러니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특히 구조적 아이러니 가운데 극적 아이러니가 탁월하게 쓰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플롯의 역전 또는 반전, 주인공의 행위가 그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 주인공은 모르고 있으나 독자는 알고 있는 경우 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오이디푸스 왕만큼 극적 아이러니를 드라마틱하게 구현하는 작품은 다신 없겠다 한다.

 

   마지막으로 의미의 측면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보자. 물론 오이디푸스 왕이 창작된 시기가 인류 최초로 맞이한 계몽주의 시대이고 또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가 가능한 때였던 만큼, ‘인간이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합리적인 인간의 추락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도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두루 알려진 대로 문학작품은 어느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미를 한 줄의 주제로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레 오이디푸스 왕작품이 제기하는 세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질문은 왕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내가 그 살인자인가라는 것이며,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별적인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승화되는 것이어서 숙연함마저 환기한다.

   앞서 이 작품을 인간의 이성도 한계가 있지만 운명극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했다. 자기 의지로 왔다는 코린토스의 사자도 그렇고, 그 누구보다 당신을 파멸시킨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폴론 신이지만, 내 눈을 찌른 것은 나다!”라고 강건하게 말하는 오이디푸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자발적인 실명은 곧 자율성이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진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라고 판단하고 또 그리 실행한 오이디푸스는 그 누구보다 자율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지만 여전히 자율성을 가진 인물,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인물이 바로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이렇듯 극단적인 상황으로 진실을 규명해나가는 과정들이 고통스럽고 처절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기백과 진실을 향한 의지와 강건한 기질들을 보노라면 인간이 가지는 가치, 그것이 얼마나 존엄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구사한 이래 더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을 직접 읽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되도록 읽는 것이 좋다. 우리는 무엇을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구현해내고 있는 지를 보려고 책을 읽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왕첫 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희곡 작품 속 유영하는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다. 소설만큼 친절한 설명이 없어서 읽기 힘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상상력을 최대한 허용하는 큰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독자는 소설로는 엄두도 못 낼, 연출할 수 있는 막강한 지위를 부여 받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부디 이 가슴 설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여기서 오늘날 뮤지컬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하겠다. 비극 작품이 연극 대본이고 따라서 대화로 이뤄졌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비극은 대화와 합창이 번갈아 나오는, 일종의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환기하자. 인간 존재의 문제를 온몸으로 제기하고 체감하고 싶다면, 대사와 합창으로 어우러진 한 편의 뮤지컬인 오이디푸스 왕을 만나보는 것은 어떤가.

   하나 더! 희곡 작품은 무조건 소리 내어읽어야 한다. 낭송의 묘미는 희곡 작품에서 제대로 발휘되므로.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도 꼭 소리 내어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순간 오이디푸스도 되고 테이레시아스도 되고 라이오스 왕도 되고 이오카스테도 되어서, 희곡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오이디푸스 왕에 한껏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이 여름에. 찬란한 비극으로 찬란한 삶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 무더운 여름에.

 

교양도서 추천 - 기초교양대학 문선영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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