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52944
작성일
2018.05.17
수정일
2018.05.25
작성자
강나연
조회수
414

나를 보내지마 /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 가즈오 이시구로 첨부 이미지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들

 

 

 

  이 세상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읽어야 할 100권의 책’과 같은 홍보성 이야기는 그래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요. 그러나 ‘되도록’ 읽었으면 하는 책들은 있습니다.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맞닥뜨린 상황에 따라서 용기와 위로를 주거나 때로는 질책을 하는 그런 책들 말입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런 책들은 이 세상에 넘쳐나지요.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도 ‘되도록’ 읽었으면 하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2017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나를 보내지 마』는 『타임』이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과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고, 전미 도서협회의 알렉스 상과 독일 바이에른 지방 출판서적연합의 코리네 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화려한 수상이나 찬사는 뒤로 하더라도, 눈부신 과학의 발달과 함께 찾아든, 인간의 이기심의 극치인 영생을 위한 프로젝트인 ‘인간 복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작품이어서 유난히 마음이 쏠렸더랬습니다. 인간 복제를 다룬 작품들은 이미 많이 발표되었지만, 대부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항에서 그친 감이 있지요. 『나를 보내지 마』는 이러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대립항을 넘어선 지점에서 맞닥뜨리는 사람살이를 섬세하고도 내밀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거든요.
  그리고 작가가 말하는 방식도 썩 흡족했습니다. 문학은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그 무엇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독자가 겪게 될 정서체험에 엄청난 영향을 주지요. 그저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몇 자로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그토록 정성들여 책을 읽지는 않거든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바로 이러한 ‘어떻게’ 부분에서 탁월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또는 정체성의 문제를 은근하게 제시하는 세밀한 심리묘사뿐만 아니라 서사를 이끌어가는 고혹적인 문체와 분위기는 정말 놀라웠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는 순전히 인간에게 장기를 이식하려고 만들어 낸 복제인간들의 삶 또는 죽음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는 인간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복제인간들, 그들은 성장한 후에 인간을 위해 서너 번 정도 장기를 적출하고 이 세상을 뜹니다. 이것이 클론(clone)으로서 그들이 처한 운명이지요. 그 가운데 특별한 학교 헤일셤을 중심축으로 『나를 보내지 마』의 이야기는 펼쳐집니다. 헤일셤을 졸업한 후 코티지에서 간병인으로 훈련을 받고 간병사로 일하는 캐시의 회상 어린 시선으로 복제인간 클론들의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어 더욱 몰입도를 높입니다.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 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 11년이라면 꽤 긴 세월처럼 들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올해 말까지 8개월을 더 일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 경력

은 거의 12년에 이르게 된다(1부 1장).

 

  헤일셤은 어른이 되기 전 복제인간들이 다니는 특별한 학교입니다. 여기서 ‘특별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헤일셤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기숙학교라서, 완벽한 복제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철저하고도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학교라서 그렇습니다. 헤일셤은 푸른 초원 위에 지어진 외관상 아름다운 학교이기도 해서 사연을 모르고 언뜻 보면 대단히 서정적이고도 애틋한 처우를 받는 학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는 장기 적출을 위해 태어나는 클론들을 최고의 클론으로 양성하려고 조성한 배경에 불과합니다. 클론들은 최상의 영양 상태를 유지하고 신체에 상처 하나 생기지 않도록 보호를 극진하게 받습니다. 이렇듯 헤일셤이 클론들에게 베푸는 각별한 배려들은 결국 인간들에게 최상의 장기를 제공하기 위한 음모인 셈이지요.

 

  놀라운 것은 복제인간인 클론들이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는 인간들이 겪을 법한 평범하지만 소중한 삶의 양태들로 가득합니다. 우정, 사랑, 질투, 이별 들이 그것이지요. 캐시와 루스, 토미가 꾸리는 삼각관계도 압권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으로 삶을 연장하려는 캐시와 토미의 고군분투도 눈물겨웠는데요, 클론인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더했습니다.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스스로 사고도 하는 복제인간이, 더군다나 인간과 외형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 클론이 인간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요.
  문득 19세기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가 ‘생명의 정수(영혼)’가 생물과 무생물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그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 메리 셸리가 경외해마지 않았던, 신에 도전한 과학자의 상징이 된 프랑켄슈타인의 모델이었다고 전해지지요. 그렇다면 영혼을 가진 클론들은 과연 인간과 그토록 다른 존재일까요.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면서 꼭 200년 전에 발표된 『프랑켄슈타인』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네요. 이식 때문이지요. 생명을 관장하는 신의 권위에 도전한 과학자, 그 상징이 된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한 시신에서 떼어낸 머리를 여러 시체로 조합한 몸통에다가 통째로 그대로 옮기는 장면이었는데요. 읽던 당시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타인의 장기나 인공장기 이식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니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줄기세포에서 개인에게 꼭 맞춘 장기를 배양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꿈꾸기까지 합니다. 이른바 프랑켄슈타인의 후예들을 우리는 이제 원하기만 하면 만날 수 있지요. 이 대목에서 『나를 보내지 마』가 내포하는 계급의 문제를 놓칠 순 없습니다. 복제인간의 장기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특히 헤일셤 출신 클론들의 장기는 최상의 상태라서 손꼽는 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생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지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는 오늘날(또는 가까운 미래에) 계급색이 더욱 내밀해지는 듯한 현상은 역사의 변증법적 맥락에서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배경은 1990년대 말 영국입니다. 이때 인간복제가 당연시되는 사회배경을 전제로 소설은 흘러갑니다. 여기서 단순히 장기를 적출하려고 복제인간을 양성하는 여타 기관과는 달리 헤일셤은 복제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곳이어서 더더욱 특별한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예술품을 만들게 하고 판매회를 정기적으로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지능적인 복제인간에 대해 점점 공포감을 품게 되어서 이후 헤일셤에 대한 후원이 끊기고 마침내는 문을 닫고야 말지요. 클론을 만든 것도 인간이고 클론을 내팽개치는 것도 인간이네요. 이렇듯 인간들은 점점 비인간적인 모습들로 파행을 겪어나가는데, 인간이 아닌 클론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니, 읽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란할 수밖에요.

 

  간병인이 된 주인공인 캐시가 기증자가 된 토미와 함께 사랑을 증표로 생명을 연장하려고 헤일셤 시절 에밀리 선생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클론으로서 그들 존재의 실체를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⑴
  “세상은 기증 프로그램의 실상이 환기되는 걸 원하지 않았단다. 사람들은 너희 학생들에 대해, 너희가

어떤 상황에서 성장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 다른 말로 하자면 얘들아, 너희가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 거야”(3부 22장).


  ⑵
  “너희가 게임의 담보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리라는 건 안다.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보렴. 너희는 그래도 행복한 담보물이야. 한때 어떤 흐름이 있었지만 이제는 지나가 버렸

어. 세상일이 때때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해. 대중의 생각이나 감정은 이쪽으로 쏠렸다

가 저쪽으로 가 버리지. 그 과정 중 한 지점이 너희의 성장기와 겹쳤던 거란다.”“마치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군요. 우리에겐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3부 22장). 

 

  “정해진 행로를 따라야”(3부 22장) 하는 “그림자 속” 존재에 불과한 클론들. ‘원본’ 인간의 장기이식을 위한 ‘스페어’로서만 의미 있는 클론들. 그래서 “우리에겐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라는 캐시의 말은 실존에 대한 희망 섞인 절망처럼 마음을 아프게 뒤흔듭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극대화된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슬프고도 비극적인 이야기, 그 이야기가 캐시의 온화한 시선으로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펼쳐져서 오히려 비장미마저 느껴지는 작품이 『나를 보내지 마』가 아닌가 합니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을 “인간 복제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데 대한 통찰”이라고 평한 『이브닝 스탠다드』의 말을 환기해 봅니다. 만약 『나를 보내지 마』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구가 아닌 시기가 오면, 그때 우리는 어떤 인간의 삶의 방식에 주목해야 할까요.

 

  작품에서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을 때 제목이 지닌 의미를 유심히 헤아리는 편이지요. 이 소설의 제목인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는 주디 브릿지워터(Judy Bridgewater)의 곡 제목으로, 이 노래가 수록된 카세트테이프 Songs after Dark는 토미가 캐시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선물을 넘어 세 주인공인 캐시와 루스, 토미의 우정과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는 모티브로 확장됩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복제인간의 삶 또는 죽음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의 제목으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Never let me go….

 

  토미가 세상을 떠난 지 두어 주밖에 되지 않은 때, 캐시는 한때 잃어버렸던 「나를 보내지 마」 곡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고물상 노퍼크에서 되찾습니다. 그때 캐시가 헤일셤에서의 환상에 젖었다가 다시 처절한 현실로 돌아오는 대목, 소설의 맨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클론과 인간의 정체성 문제와 다시 처절하게 맞닥뜨리게 됩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 아닌 존재들, 그들의 가슴 먹먹한 이야기

 

  내 머릿속에는 그 잡동사니들, 나뭇가지에 걸린 플라스틱 조각, 해안선 같은 철망을 따라 걸려 있는

기묘한 물건들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상상했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여기

모두 모여 있다고, 이 앞에 이렇게 서서 가만히 기다리면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하나의 얼굴이

조그맣게 떠올라 점점 커져서 이윽고 그것이 토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리라고, 이윽고 토미가

손을 흔들고, 어쩌면 나를 소리쳐 부를지도 모른다고. 이 환상은 그 이상으로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 이상

진전시킬 수도 없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3부 23장).

 

 

  그래서 “이시구로는 진실이 종종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독특한 문체를 지닌 작가이다.”라는 『맥린스』의 언급이 예사롭지 않게 들립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후예가 함께하는 오늘날, 인간과 외형상 구분되지 않는 온전한 생명체이지만 인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살아가는 복제인간 캐시와 만난다면, 또는 루스나 토미와 만난다면, 여러분은 ‘진실’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실는지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아니 이 물음의 진의를 고민하기 위해 『나를 보내지 마』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추천 - 기초교양대학 문선영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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